풀의 미학, 상원의 왕골공예

상원(桑源) 남상교 예술 인생의 도전과 개척의 역사는 염색공예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염색에 대한 연구와 실험에 집중하는 1960년대 이래로 그는 우리의 민속공예, 특히 왕골공예의 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1980년 전후로 서서히 자신만의 독자적이고 또한 독보적인 ‘예술공예로서의 왕골공예’의 영역을 알리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상원이 왕골공예에 특별히 애정을 갖는 이유는 왕골공예가 섬유공예의 염직(染織)과 비숫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날실에 물을 들여 그 실로 직조하는 염직공예, 즉 텍스타일은 다양한 염색 기법이 연구되고 개발되어 발전에 이르게 되는 섬유공예의 최종 도착지로서 염색이 주 전공인 그에게 매력적인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왕골공예의 재료인 왕골은 과거 우리 고유의 특산 공예작물로 재배 수확되었으며, 재질적 특성으로 볼 때, 섬유조직이 강인하면서도 염분이 함유되어 있어 유연할 뿐만 아니라 은은한 광택과 함께 온화하고 품격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재질감으로 수편조(手編造) 공예품 제작 재료로 그야말로 적합한 재료라고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상원은 왕골이라는 재료가 갖는 의미에 경도(傾倒)되는데, 그것은 일명 ‘완초(莞草)’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풀이며, 이 풀이 지닌 강인함과 유연함이 흔히 우리의 민족성에 비유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옛 부터 백성을 민초(民草)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상원 남상교가 왕골공예에 푹 빠지게 되는 계기이며, 또한 여러 민속공예 중 왕골공예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이유인 것이다.

왕골공예란 초경(草莖) 공예의 한 종류로 풀의 줄기로 생활의 용품이나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공예로서 자리나 삼합(용기) 등이 삼국시대 이래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백성들 사이에서 전승적 전통성을 간직한 향토 공예품으로 널리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며, 고품격의 왕골 공예품으로 제작되어 왕실에 진상되고, 더 나아가 중국에 보내는 증여품 및 외국과의 중요한 교역품으로도 활용되며 각광을 받아왔다.

근세기에 이르러서는 국난(일제강점기, 한국전쟁)으로 침체기에 접어들다가 1960년대 중반 생산적 재기와 전통적 민족 문화의 계승을 도모할 목적으로 전국적 생산 단지가 조성되어 국내 수요의 증대 및 수출의 확대로 이어져 왕골공예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러나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개성화되고 다양화되는 수요의 특성에 부응하지 못한 채 왕골공예는 또 다시 중대 고비를 맞게 된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재차 상승기로 진입, 그야말로 잘 나아가며 활성화의 정점에 이르는 1980년대, 왕골공예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형태의 자생적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런 재건과 진흥의 중심에상원 남상교의 왕골공예에 대한 남다른 애정에 동반된 헌신과 기여가 있었다. 그는 수요 증대가 결국에는 왕골공예 성패를 결정하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소재 가공, 디자인 혁신 등 구식을 개량하고 새로운 것을 개발하려는 끊임없는 내적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상원은 당시 기술적으로 보아도 국내 최고의 염색 전문가였고, 더욱이 대학 교수로 예술 공예의 권위자였다. 왕골공예의 기본 재료인 왕골의 다양한 색채 구현 및 자리와 꽃삼합 등의 디자인 설계도 제작, 그리고 이와 관련된 교재의 보급 등 강화도가 왕골공예의 주요 산지로 자리 잡는데 상원 남상교의 아낌없는 지원은 그 견인의 축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1985년 강화도에서는 4,000여 가구가 화문석, 화방석, 꽃삼합 등을 한해 10만점 넘게 생산할 정도였다고 한다.

시대적 시련이랄까, 적어도 강화도, 그리고 왕골공예 분야에서는 이런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1990년 중반 이후 외국산 저가 저급의 초경 제품이 유입되고, 또한 저렴한 카펫, 등나무, 대나무 등의 자리가 점차 인기를 끌면서 강화도 왕골공예, 아니 우리의 왕골공예는 그 원래의 자리를 내어주며 쇄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이후 민관 합동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판로 개척에 실패하며 깊은 수령의 늪에 빠져들어 현재 늪에서 목만 내 놓고 숨 쉬고 있는 심각한 지경에 처해 있다. 강화의 현지인들이 이런 시장 논리의 상황을 독자적으로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며, 또한 고품질의 상품성으로 가격경쟁력과 편의성의 공습을 막아 내는 데에도 분명 한계가 있기에 상원 남상교의 진단과 처방도 이제는 더 이상 효과를 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게다가 왕골공예 전문가인 상원을 통한 디자인 지원 요청을 중단하게 된 것도 이런 쇠퇴 상황을 더욱 가속화시킨 이유라는 게 현지 공예인들의 평이다.

전승 공예가 및 생활 공예인의 예술 멘토, 미적 가치의 전파에 열중하는 예술 전도사, 현지 공예인들의 디자인 지도 교수 등 어떤 식으로 부르든 간에 상원 남상교의 왕골공예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각별함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의 구성원이자 전문가로서 여건이 부족하고, 필요가 요청되는 지역이나 분야에서 자신의 기량과 역량으로 애정어린 도움을 주는 선행은 특별히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상원 남상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왕골공예의 상품적 이미지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그야말로 남다른 마음을 보탠다. 1990년 일본에서 개최된 왕골공예 전시를 통해서 말하자면 왕골공예의 국위선양을 한 셈이다. 한편 일본 전시는 현지의 왕골공예 육성을 위한 디자인 연구와 개발, 그리고 현장 지도 등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가 미적 표현과 함께 예술의 영역에서 왕골공예의 발전적 계승과 새로운 성장 가능성 등을 연구하고 타진해 보는 의미있는 전시이기도 했다.

상원 남상교의 왕골공예에 대한 박용숙 전 동덕여자대학교 교수(미술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1990년 10월 25일 개최된 ‘상원 남상교 왕골공예 초대전(일본 호리 갤러리)’의 팜플렛에 게재된 “상원 남상교 왕골공예 초대전에”에서 발췌 인용된 글이다.

“상원의 왕골공예는 자연에서 얻어진 영상들을 미적인 형태로 바꾸어 놓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형태와 표현 조직을 균형 있게 조화시키면서 3차원의 구조와 질감을 동시에 표현해 내는 어려운 창작 활동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그는 자연의 인상과 생활의 체험에서 영감을 얻어내며 그렇게 해서 제작된 작품들은 왕골의 특성인 천연 광택을 강조하는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왕골의 온화한 재질감, 섬세한 조직, 세련미 등은 기품이 있는 하나의 생명체로 이해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상원의 공예 예술이 도달하고자 하는 한국적인 이미지에 매우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원은 왕골 재료로 태경종과 세경종을 사용하였고, 표현기법으로는 자신이 개발한 이중 바로 엮기 기법을 이용하여 왕골이 가지고 있는 조직의 미와 입체적 조형미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색조가 선명하고 착색력도 큰 카티온 염료(cation dye)를 사용하여 색상을 표현하였으며, 또한 그가 개발한 은나노 가공액을 도포하여 영구적으로 보존 처리하였다.

일본 전시로 상원 남상교의 왕골공예는 “풀의 미학”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이는 풀로 엮은 예술적 경지에 감탄한 일본 NKK 방송에서 그의 왕골공예에 붙인 명칭이다. 그러나 이런 찬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전통 민속공예로서의 왕골공예는 좀처럼 쇠락을 길에서 벗어나고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전승적 보존의 최소한의 조치로 1996년 왕골공예 장인인 이상재 선생이 ‘중요 무형문화재 103호’로 지정되었고, 뿐만 아니라 2004년에는 강화도 현지 공예인들이 중심이 되어 ‘강화완초전통보존회’가 창설되었으며, 2006년에는 ‘강화 화문석 문화관(강화군 송해면 양오리 소재)’이 설립되는 등 왕골공예 육성을 위한 민관 모두의 온갖 노력이 경주되기도 하였다.

왕골공예의 활성화를 위한 바람은 왕골공예품이 제작 생산되는 강화도(최근 유일한 생산지) 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60년 이래로 강화를 출입하며 꾸준히 왕골공예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상원 남상교가 2003년 서울에 상원미술관을 설립한 것이다. 물론 상원미술관이 왕골공예 전문 미술관은 아니었으나 사라져가는 민속공예의 발전적 계승을 위한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를 한 것은 분명하며, 그 가운데 왕골공예가 중심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현지 공예인들과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으나, 그는 이를테면 ‘예술로’ 왕골공예의 재건 및 활기 증진 모색을 꿈꾸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된 일본 초대전 이후 상원 남상교는 이런 계획을 쭉 수정 보완하며 키워왔다.

단순 기능적 반복 생산 위주의 생활공예, 내지는 전승공예로서의 왕골공예가 아니라 왕골공예에 예술혼을 불어 넣으려 애써 왔던 작가의 노력을 그 결과물인 작품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곧 열릴 것이다. 수요자 관점에서 사용하는 용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더불어 왕골공예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이로써 삶의 품격을 높이는 ‘예술공예로서의 왕골공예’의 가능성, 그리하여 사라져가는 왕골공예의 위기 극복 및 지속 가능성, 이것이 상원 남상교의 비전(vision)의 핵심 포인트이다. 이런 노고와 열정이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에게도 전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해당 전시가 있을 때의 관객들의 공감과 호평은 말할 것도 없고, 왕골공예 전시가 없을 때 조차 기끔씩 강화도를 방문했다가 이쪽 상원미술관으로 왔다고 하면서 상원의 왕골공예 작품을 볼 수 있는지 이쁘게 떼쓰는 젊은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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