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예술, 상원의 염색공예

한국 현대 공예는 지난 세월 갖은 역경과 난관 속에서도 점진적이고 꾸준한 성장을 이루며 오늘에 이르렀다. 대학에 공예과가 설치되고, 공예 관련 교과목이 개설되는 1960년 전후로 한국 현대 공예의 개척기가 실질적으로 시작된다고 보면 한국 현대 공예의 역사도 벌써 반세기를 훨씬 넘어 60년에 이르는 세월로 그 당시 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 새로운 길을 걷고자 했거나 또는 발전적 계승의 걸음을 내딛고자 했던 공예인들이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이 분야의 원로가 되어 있다. 불모지에 밭 갈고, 씨 뿌려 정성스레 가꾸어 결실을 거둔 그 역사의 전 과정에서 주역으로 큰 흐름을 견인해 왔던 원로 공예인의 명단 가운데 상원(桑園) 남상교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한국 현대 공예의 개척과 도약의 시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에서 눈에 띠는 기여와 함께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상원 남상교의 예술 인생 60년은 한국 현대 공예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한국 현대 공예의 태동과 그 전개 양상에서 볼 때, 저 멀리 삼국시대 이래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을 거치면서 면면히 이어 내려 온 우리의 찬란한 전통 공예의 유산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이들이 우리 것을 받아들이되, 이에 안주하지 않고, 전통 공예를 넘어 진화하고 발전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하였다고 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바로 서구적 미의식과 표현양식 등을 전폭적이고 과감하게 수용하여 새로운 예술의 세계로 다가서는 공예인들도 있었다. 실로 인생 항로의 결단이 요구되는 현실 상황 속에서 상원의 예술 인생의 향방(向方)은 후자로 정해지고, 그 앞에 염색공예라는 그에게 그 당시로서는 미지의 새로운 영역의 문이 열리며, 그야말로 도전과 개척의 역사가 시작된다.

 

상원 남상교는 어릴 적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또한 흙을 가지고 노는 것을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술에 대한 배움을 늘려나가기를 꿈꾸며 대학 진학을 결심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미술의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 일이며, 욕심을 낸다고 해도 출발점에서 부득이 어떤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그림 그리기를 전공하고도 싶었지만, 결국 조소(조각) 전공으로 대학 진학을 하게 된다. 195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조소(조각) 전공의 결정은 그가 경성공립공업학교(5년제) 건축과 출신이라는 사실과 평소 존경하였던 한국 추상 조각의 대가 김종영 선생께서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교수로 봉직하고 있었다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순수 미술에 열중했던 7년의 대학 생활과 졸업후 바로 동명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으며 학생 지도와 함께 동시에 자신의 예술 역량을 늘려갔던 상원 남상교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일명 ‘국전’)에 10여회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63년 서울여자대학교 공예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염색’을 주전공으로 공예에 예술 인생의 뿌리를 내리게 된다.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전문가가 많이 부족한 시대였고, 그래서 지금처럼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후 역량이 올라왔을 때 누구를 가르치는 자격이 부여되는 그런 현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실력 없이 안 될게 되는 경우는 없다. 조소와 회화로 단련된 탄탄한 예술적 기본기가 그에게 있었고, 한번 관심을 가지면 깊은 연구로 심취해버리는 성향 때문인지, 그는 곧 염색에 천착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염색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 결과가 대략 1970년 전후로 그의 연구 성과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사실 상원의 염색은 아주 우연히 시작되었다고 한다. 노총각 미술교사가 소속 학교 교장으로부터 인생의 반려자를 소개받아 결혼을 하게 되었고, 상원의 그녀는 가정학과 출신답게 평소 옷 만들기 등 의상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국전에서 당선된 상원의 인체 조소 작품을 본 후 즉시 그것을 보관하기 위한 작품 덮개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상원은 정성을 들여 만든 그녀의 덮게 위에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작품 덮개가 또 하나의 멋진 작품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 본 상원의 배우자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리하여 그에게 적극적으로 염색을 권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종의 ‘나비 효과’라 할까, 그녀의 권유는 상원 남상교의 예술 업적의 작은 단서였을지 모를 일이다.

상원 남상교의 염색은 우리의 전통적 천연염색은 아니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심정이랄까, 그는 서구의 염색 미술에 깊은 영향을 받아 새로운 예술 영토의 개척에 나선다. 염색공예의 성공과 발전을 위한 사투에 그는 실크스크린을 주 무기로 돌진하였다. 염색 표현 기법으로는 침염법, 피복착색염법, 칠염법을 기본으로 하여 묘염법, 호염법(찹쌀호염법, 멥쌀호염법, 맥호염법, 화학호염법), 방염법(호방염법, 납방염법), 발염법(백색발염법, 착색발염법), 방발염법(방염 및 발염의 동시성염법), 주염법(안료주염법 및 염료주염법), 홀치기염법(단색, 다색염법), 류염법(단색 및 다색의 안료, 염료염법), 형지염법, 분무염법, 전사염법, 분설염법, 백도염법 등 직간접 응용기법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필요에 따라 활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안료, 염료 등 염색 재료와 그 결합 대상인 피염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양자가 합쳐진 상태, 즉 색채 염착(染着)에 대한 다각도의 깊은 연구와 실험에 일로 매진하는 등 그야말로 염색공예의 학리(學理)적 체계를 세워가는 일에 평생을 몰두하였다. 앞으로 소개될 그의 작품들도 이런 투지와 집념의 소산이다.

상원 남상교의 염색에 대한 연구와 실험, 그리고 창작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언제나 거침없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이후 보게 될 작품들인 생동, 음류1,2, 고원1,2, 상야, 기원, 심곡과 같은 것은 염색작품 제작 초기, 제작 공정에서 거듭된 실패를 거치며, 이를 보완하여 제작된 작품들이다. 실패의 원인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던 중 문제를 제작 기법이 아닌 재료에서 찾게 되면서 단독 재료의 문제와 혼합 재료의 문제를 그는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각 재료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고, 색조 제작을 연구하던 끝에 색파라핀(color paraffin)을 제조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은 색파라핀을 이용하여 묘화의 과정을 거친 후, 발염기법을 적용해 후처리 공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들이다. 색파라핀은 파라핀 용액 + 각종 색상별 용액을 혼합한 것인데, 파라핀은 물과의 융합이 어렵기 때문에 염료 가루를 용해시키는 데 가장 합당한 것은 알코올이었다. 즉, 다양한 색상의 염액은 염료 + 알코올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파라핀 기법은 현재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상교기법으로 불리며 후학들에 의해 더욱 심층적이고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상원 남상교의 염색 인생은 아무리 그 영향을 줄여 평가하여도 우리나라 염색공예, 더 나아가 한국 섬유공예의 성장과 발전의 마중물이었다. 섬유 미술 분야의 기여도 짧게 말하기 어려우나 섬유 산업에 대한 파급력은 그야말로 지대하다고 하겠다. 1960년대 이래로 대한민국 조국 근대화(산업화)의 슬로건(slogan)을 내 걸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하에 여러 국가 정책적 사업들이 시작되었는데, 그 가운데 섬유 산업은 중심 중의 중심이었으며, 이에 착색수단으로부터 묘화염, 날염 등 색의 체계 전 영역에서 미적 기여를 이룬 상원 남상교의 염색 연구와 그 성과물들은 우리나라 섬유 산업의 고부가가치 창출에 핵 파워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1978년 한양대학교 응용미술과로 자리를 옮긴 후 1983년 학교의 제 2캠퍼스(현재는 ‘에리카’ 캠퍼스) 조성 계획에 따라 자진하여 안산으로 내려가 산업미술대학 공예과를 만들었을 때 이래로 인근 반월공단(염색생산기지)의 규모가 커지고 산업적 위세가 높아졌던 것도 상원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대학에서 염색공예로 후진 양성을 하고, 더 나아가 섬유 산업의 멘토로서 우리의 시대적 과업 수행에 기여하고 헌신하는 등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를테면 ‘모범 국민’의 역할을 하는 인생 행보도 간과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상원 남상교의 예술 인생 60년의 기본이자 중심은 어디까지나 예술가로서의 그의 삶이다. 그리고 그 예술 여정의 소산(所産)인 상원의 작품들을 빼놓고는 이번 전시의 목적 달성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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